
용인특례시가 최근 석성산성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고시하면서, 지역의 오랜 유산이 뒤늦게나마 제도권 보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 한 줄짜리 행정 고시는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선에 가깝다. 기념물 지정은 성과의 리본이 아니라 앞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를 공식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천년의 시간, 그러나 너무 오래 방치된 유산
천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였지만 석성산성은 여전히 ‘제대로 된 문화재’가 아니다. 한강 유역과 남부 내륙을 잇는 길목을 내려다보는 이 산성은 삼국시대 군사 거점으로 추정되는 유적으로 단순한 지방 산성이 아니라 수도권 남부 방어 체계의 핵심 축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석성산성을 대하는 현실은 냉혹했다.
석성산성은 오랜 세월 시민들에게는 그저 인기 있는 등산 코스의 일부로 소비돼 왔다. 성벽은 여기저기서 끊겨 있고 유적의 구조와 의미를 설명해 줄 안내 체계는 부실하다. 산성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군사 전략, 당시 생활상을 입체적으로 전달해 줄 ‘스토리’도 사실상 부재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을 단순한 무지의 결과로만 보지 않는다. 석성산성의 존재와 가치가 학계와 지자체에 이미 상당 부분 알려져 있었음에도, 체계적인 조사·정비·활용 계획이 뒤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르던 유산이 아니라, 알면서도 방치해온 유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천년을 버텨온 성벽이 끊긴 채, 수도권 남부 방어 체계의 심장부였던 산성이 주말 등산객의 쉼터로만 기능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문화재 인식 수준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제 석성산성을 단순한 ‘산책로의 배경’이 아닌, 역사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교육·문화 자산으로 되살릴 구체적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 이상일 시장의 선택, 방향은 맞다
용인시가 석성산성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한 것은 단순한 문화재 행정 절차를 넘어서는 전략적 선택으로 읽힌다. 이상일 시장 체제 출범 이후 용인시는 반도체, 플랫폼시티, 첨단 산업을 축으로 한 ‘미래 산업 도시’ 구상에 속도를 내 왔다. 이번 결정은 그 연장선에서 도시 경쟁력의 외연을 역사·문화 영역까지 넓히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상일 시장은 취임 이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거점, 플랫폼 기반 첨단 산업 도시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대규모 투자 유치와 산업 인프라 확충에 집중해 왔다. 석성산성의 경기도 기념물 지정은 이러한 산업 중심 전략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사를 더해, 도시의 정체성과 브랜드 가치를 동시에 끌어올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도시는 건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완성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기업과 인구를 끌어들이는 힘은 산업 인프라뿐 아니라 그 도시만의 역사와 문화, 장소성이 결합된 ‘스토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석성산성은 용인의 지리·군사·생활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향후 교육·관광·문화 콘텐츠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경기도 기념물 지정은 용인시가 산업 경쟁력과 함께 역사·문화 자산을 도시 전략의 축으로 삼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반도체와 플랫폼시티로 상징되는 ‘미래’ 위에 석성산성이라는 ‘과거’를 덧입혀 용인만의 서사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 문제는 ‘지정 이후’다
석성산성이 문화재 지정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 곳곳에 이미 수많은 지정 문화재가 존재하지만 상당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채 이름만 남은 유산으로 방치돼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과 지역사회에서는 석성산성 역시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우려한다.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보존·활용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행정이 형식적인 조치에 머물 경우 실질적인 가치는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지방자치단체들이 문화재를 관리할 때 흔히 택하는 방식은 안내판 몇 개를 세우고 탐방로를 간단히 정비한 뒤 “문화재입니다”라는 표지판을 부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예산과 인력이 한정된 상황에서 최소한의 관리만으로 ‘지정 문화재’라는 행정적 요건을 충족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비판이다.
문제는 이 같은 방식으로는 문화재가 지역 주민과 방문객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체계적인 해설, 교육 프로그램, 역사·생태 자원과 연계한 탐방 코스, 지역 상권과의 연동 전략 등이 빠진 채 단순한 ‘구경거리’로만 남으면 문화재는 곧 잊힌 공간으로 전락하기 쉽다.
석성산성 역시 지정 이후 활용 전략이 뚜렷하지 않다면 기존의 수많은 지정 문화재처럼 “이름만 문화재”인 채 사람 없는 유산으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역사회와 행정이 함께 장기적인 보존·활용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번 지정은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는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종이 위의 행정 절차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 용인이 풀어야 할 진짜 질문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 것인가.”
지금 용인이 던져야 할 질문은 관 주도의 ‘활성화’가 아니라 시민과 방문객의 ‘이유’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행정이 돈을 투입해 시설을 늘리는 방식의 전통적인 재생 모델로는 더 이상 도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핵심은 사람들의 이동과 선택을 이끄는 ‘이야기’와 ‘경험’이다.
용인은 삼국시대 군사 거점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는 도시를 찾게 만들 동력이 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군사 거점이라는 사실은 정보에 불과하다”며 “정보를 자산으로 바꾸는 과정이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안내판, 박물관식 전시만으로는 방문 이유를 만들기 어렵다는 의미다.
정보를 자산으로 전환하는 첫 단계는 스토리 만들기다. 삼국시대라는 시간, 군사 거점이라는 기능, 지형과 길, 인물과 사건을 엮어 ‘이곳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역사 해설이 아니라 방문객이 자신을 투영하고 참여할 수 있는 서사 구조가 필요하다. “내가 이 이야기에 들어가 볼 만한 이유가 있는가”가 관건이다.
두 번째는 경험 설계다. 스토리는 곧바로 체험 콘텐츠로 번역돼야 한다. 가상 전투 시뮬레이션, 전략 회의 미션, 고대 통신·수비 체험 등으로 재구성해 방문객이 ‘보고 듣는 것’을 넘어 ‘해보는 것’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가족 단위, 청소년, 역사 마니아 등 대상별로 난이도와 몰입도를 달리 설계하면 재방문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 경험은 시간대 확장을 통해 도시 체류를 늘리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 야간 프로그램은 그 핵심 축이다. 낮에는 역사·자연을 중심으로 한 체험, 밤에는 조명·미디어아트·퍼포먼스를 결합한 야간 콘텐츠로 전환하면 하루 체류를 ‘하룻밤 머무는 일정’으로 바꿀 수 있다. 숙박과 식음료, 교통 수요가 함께 발생하면서 지역 경제에 실질적인 효과가 생긴다.
마지막 퍼즐은 도시와의 연결이다. 유적과 체험 공간이 주변 상권과 단절된 채 섬처럼 존재한다면, 소비와 일자리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 역사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역 카페, 식당, 공방, 로컬 브랜드 숍으로 이어지는 ‘경험 동선’을 설계해야 한다. 역사 체험을 마친 뒤 당시 식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뉴를 맛보고 관련 굿즈를 구입하는 일련의 흐름이 대표적이다.
결국 용인이 풀어야 할 진짜 질문은 시설 확충이나 단기 방문객 수 증대가 아니다. “왜 사람들이 굳이 이 도시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는 일이다. 그 답은 스토리에서 시작해 체험으로 구체화되고 야간 프로그램과 상권 연결을 통해 비로소 도시의 ‘자산’으로 완성된다.
■ 개발 도시 용인, 이제 ‘깊이’를 증명할 시간
경기 남부의 핵심 성장 거점으로 떠오른 용인은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을 이뤄낸 대표적인 개발 도시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대규모 택지, 교통망 확충이 잇따르며 ‘미래 산업 수도’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그러나 “도시의 속도만큼 깊이도 함께 쌓였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이 물음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석성산성이다. 석성산 정상부에 자리한 이 산성은 용인의 오랜 시간을 품은 유적이지만 오늘의 용인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의미는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반도체 공장이 ‘미래’를 상징한다면, 석성산성은 이 도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보여주는 ‘정체성’의 축에 가깝다.
도시가 지속 가능하려면 성장 동력과 함께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 즉 정체성이 필요하다. 용인의 경우 반도체 산업과 같은 첨단 개발은 도시를 앞으로 밀어 올리는 엔진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역사 자산은 도시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에 해당한다. 엔진만 있고 나침반이 없다면 도시의 성장은 숫자와 규모로만 기록될 뿐 시민의 삶 속에 뿌리내리기 어렵다.
석성산성은 그런 의미에서 용인의 ‘시험대’로 읽힌다. 이 유적을 단순한 관광 자원이나 등산 코스가 아니라, 도시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 공간으로 키워낼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보존과 활용, 스토리텔링과 시민 참여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석성산성은 낡은 유적에 머물 수도, 용인의 깊이를 증명하는 무대가 될 수도 있다.
■ 기념물은 이름이 아니라 결과로 남는다
석성산성이 마침내 이름을 얻었다. 오랜 시간 지역의 산자락에 묻혀 있던 이 유산은 기념물이라는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받으며 지도와 문서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산성이 되살아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념물’이라는 행정 용어가 곧바로 시민의 기억과 일상 속 존재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정은 출발점일 뿐이다. 석성산성이 진정한 의미의 문화유산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져야 한다. 현장을 찾는 이들이 없으면 석성산성은 여전히 ‘잊힌 유산’으로 남는다. 안내판 몇 개 행정 문서 속 번호 하나로는 이곳의 가치를 온전히 되살릴 수 없다.
기념물은 지정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채워진다. 지역 주민이 주말 산책 코스로 오르내리는 길이 될 수도, 학생들이 역사와 지리를 배우는 야외 교실이 될 수도, 도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울리는 문화·생태 탐방로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관리의 이름으로 접근이 제한되고, 설명과 체험이 없는 공간으로 남는다면 석성산성은 다시 ‘이름만 있는 유산’으로 퇴색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과제는 용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존이냐 개발이냐’의 낡은 이분법이 아니다. 훼손을 막는 기본적인 보존은 전제로 하되, 그 위에서 어떻게 시민과 공유하고, 지역의 역사·관광·교육 자원으로 엮어낼 것인지에 대한 ‘활용의 수준’이 관건이다. 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탐방로 정비, 해설 프로그램, 디지털 안내 시스템, 지역 축제와 연계한 콘텐츠 개발 등 구체적인 활용 전략이 요구된다.
이 선택은 석성산성의 미래를 가른다. 활용의 상상력과 실행이 더해진다면 석성산성은 ‘기념물’에서 ‘살아 있는 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반대로 지정에 만족한 채 후속 전략을 미루거나 형식적인 관리에 그친다면, 이 산성은 또 한 번 땅속과 기록 속에만 머무르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기념물은 이름으로 남지 않는다. 시민의 발길과 경험,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기억과 이야기가 쌓일 때 비로소 결과로 남는다. 지금 용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석성산성이 살아날지, 다시 묻힐지가 결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