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헤드라인 문수철 기자] 여든 아홉 암자가 있었다는 광교산의 종파는 화엄종으로 추측되고 있다. 먼저 고려말의 고승 진각국사가 화엄종을 집대성했다는 기록으로만 보아도 창성사는 화엄종을 기반으로 하는 사찰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록에 따르면 진각국사 배천희는 화엄종 승려로 고려 공민왕 때 국사를 지낸 고승이다. 고려시대의 화엄종은 대표적인 4대 종파에 속했지만, 고려 후기에는 그 종세가 타 종파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화엄종 승려 진각국사는 원나라 유학을 통해 선종의 선법을 익히기도 했다. 공민왕 16년에 국사에 책봉된 그는 고려후기 국사에 책봉된 유일한 화엄종 승려였다. 아마 화엄종 출신 신돈의 추천이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선교겸수 또한 그가 국사에 책봉되는 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계종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당시에 화엄종 출신의 국사 활동은 자유롭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진각국사는 부석사에 주석하게 된 공민왕 21년부터 몇 년 동안 부석사 중수 불사에 힘을 쏟아 복구를 완성했다. 화엄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진각국사의 희망이 부석사 중수 불사로 표출된 것이었다고 본다.
이후 진각국사는 부석사 중창을 마치고 1386년에 수원 광교산의 창성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원 광교산 창성사는 지금은 폐사가 되어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창성사는 그의 입적 직전에 그와 문도들의 거점 사찰로 마련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입적 후 국사의 탑비가 건립된 주요 사찰이지만 시 당국과 종교계의 무관심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여든 아홉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만 본다면 수원 광교산 자락에 위치했던 창성사는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화엄종 사찰이었으며, 전국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화엄종사의 본찰로 알려진 합천 혜인사의 암자는 16개 암자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창성사의 규모가 혜인사의 5배 정도 컸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