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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민중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쉼터 모란공원

[경기헤드라인 문수철 기자] 종북 몰이의 칼날이 서슬 퍼런 2014년 2월, 민중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 남양주 모란공원을 찾았다. 남양주 화도에 있는 모란공원은 아직 겨울철의 냉기에 휩싸인 때문인지 유난히 바람이 차가왔다.

모란공원에는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동안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겼던 사람들의 넋들이 쉬고 있었다. 모란공원은 원래 벽제로 가지 못한 분들의 시신들이 이곳에 안장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주화의 성지다.

모란공원은 지난 1966년 남한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로 현재 부지 100여만평에 13,000기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다. 1969년 권재혁선생, 1970년 전태일 열사, 1971년 김진수 열사, 1973년 최종길 열사가 모셔진 이후 40여년에 걸쳐 민주화와 민중해방을 향한 삶을 살다 돌아가신 120여분의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6년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다 산화하신 박영진 열사를 모란공원에 안장하기 위해서 한 달여에 걸친 장례투쟁으로 30여명 이상이 구속되는 사건이후, 모란공원에는 노동자 · 민중의 권리쟁취와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노동자, 학생, 빈민, 장애인 등이 모셔지게 됐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전태일 열사가 쉬고 있는 곳이었다. 비교적 공원 정상부에 있는 전태일 열사의 묘비 옆에는 이름 모를 누구인가 꽃을 가져다 놓아 그의 벅찼던 삶에 대해 위로 하고 있었다.

열사는 16살 이라는 어린나이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로 노동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봉제공장의 열두어 살 소녀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에 분노한 동지는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과 함께 ‘바보회’ 모임을 조직해 ‘근로기준법’ 을 공부하면서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 ‘바보회’ 를 ‘삼동친목회’ 로 바꾸고 직접 청계천 노동자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 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노동처에 제출 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근로조건 개선 없이 업주들의 횡포와 노동부 등 정부당국의 멸시가 이어지자 청원과 진정대신 1970년 10월 20일과 24일 시위를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을 계획했으나 탄압에 의해 실패했다. 결국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의 의미를 담아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며 분신, 운명했다.

모란공원 민주화 열사들의 묘지 중에서 가장 윗선에 모셔진 전태일 열사의 묘지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죽음을 위로하고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옆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시자 모든 노동자의 영원한 어머니이었던 이소선 여사의 묘지도 함께 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조직적 은폐
청와대와 안기부가 개입했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전태일 열사의 묘지 옆으로 몇 걸음을 옮기자 박종철 열사의 쉼터도 볼 수 있었다. 65년생 이었던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 언어학과에서 학생회장을 맡아 중심적으로 학생활동을 전개하다 지난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서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됐었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동지는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인 수배자를 잡기 위해 대기 중이던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물고문과 전기 고문등 온갖 살인적인 고문에 의해 14일 운명했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로 사건을 축소 은폐하고 벽제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의 거센 투쟁에 의해 은폐사실은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며, 이를 기폭으로 해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은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거제에서 구로까지 민주화를 외쳤던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군사정권은 박종철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에서 끝을 볼 수 있었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 은폐 사건은 지난 2009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에 정부가 국가안전기획부, 내무부, 법무부, 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개입되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20여기의 묘지들을 일일이 다 참배하기는 어려워 공원을 빙 둘러 돌아보며 나오는 길에 민주당의 영원한 상임고문이었던 김근태 전 의장의 묘를 발견했다.

민주당의 영원한 상임고문 고)김근태 의장

김근태 의장은 지난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 번째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1972년 2월 피신 상태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가 되어,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로 살았다.

인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1983년 9월 한국 최초의 독자적·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하며 초대 의장을 맡았다. 1985년 8월 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되었다가 남영동에 있는 대공분실에서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당시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는데, 이후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6월 30일 석방된 그는 다음 해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하고는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으나, 1990년 5월 전민련 결성선언문이 빌미가 되어 다시 구속되어 1992년 8월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타는 목마름처럼 민주주의를 갈구 했던 사람들의 쉼터 모란 공원은 오늘 조용하고 또 고요하다.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 모든 분들이 지금 다시 환생하신다고 해도 종북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2014년의 어렵고 두려운 현실을 향해 이분들은 무엇이라고 말을 하며, 어떻게 행동하실까. 대한민국에 지금 이분들은 계시지 않지만 그들의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질 것이다.

탐방을 도와주신 ‘모란공원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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